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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걸음 수와 수명, 만보 못 채워도 괜찮았다

장수가 목표

잠들기 전에 폰을 봤더니 6,412보라고 찍혀 있었다.

또 못 채웠네. 습관처럼 그 생각이 먼저 났다. 만보를 채워야 오래 산다는 그 말. 언제부터 머릿속에 박혀 있었는지도 모르겠는데, 3,588보 모자란 걸 보고 있으니 하루를 대충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다. 지금 와서 보면 그 기분이야말로 근거가 없는 거였다. 만보라는 숫자부터가 그렇더라.

만보라는 숫자는 어디서 왔나

이걸 알고 좀 허탈했다. 하루 10,000보라는 숫자, 알고 보니 의학 연구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1965년 일본 야마사(Yamasa)라는 회사가 개인용 만보계를 팔면서 붙인 이름이 “만보계(万歩計)”, 그러니까 “만 걸음 계측기”였다. 도쿄 올림픽 직후에 사람들이 몸 좀 움직여보자는 분위기였고, 거기 얹혀서 팔린 제품이었다. 하버드 헬스 블로그를 봐도 10,000이라는 숫자를 뒷받침하는 연구는 출시 당시 없었다. 그냥 기억하기 좋고 어감이 좋아서 고른 숫자에 가까웠다.

60년 된 마케팅 카피 하나에 매일 밤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거다. 나원참. 만보계 회사가 그렇게 오래 나를 따라다닐 줄이야.

걸음 수에 따른 사망 위험 감소

7,000보에서 대부분이 나온다더라

그럼 진짜 숫자는 몇일까. 이게 궁금해서 찾다가 제일 최근 자료를 봤는데, 답이 생각보다 낮았다.

2025년 Lancet Public Health에 실린 메타분석이 있다. 시드니대 연구진이 57개 연구를 모아 정리한 건데, 걸음 수를 늘릴수록 사망 위험이 낮아지긴 하지만 그 이득 곡선이 대략 5,000~7,000보 부근에서 완만해진다는 내용이었다. 계속 가파르게 좋아지는 게 아니라, 어느 지점부터는 더 걸어도 그래프가 평평해진다는 거다.

숫자로 보면 이렇다. 하루 7,000보 걷는 사람은 2,000보만 걷는 사람보다 전체 사망 위험이 47% 낮았다. 심혈관질환으로 죽을 위험도 비슷하게 낮았고. 절반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 그 대부분이 만보가 아니라 7,000보에서 이미 나온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6,412보 찍힌 날, 나는 이득의 거의 다를 이미 챙긴 셈이었다. 3,588보 더 걸었어도 그래프는 크게 안 올라갔을 거고. 연구진도 “10,000보가 더 활동적인 사람에겐 여전히 좋은 목표지만, 7,000보가 더 현실적이고 달성 가능한 목표일 수 있다”고 짚었다. 만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7,000보부터 이미 충분하다는 쪽이다.

나이 들수록 목표를 낮춰도 되는 이유

여기서 하나 더 걸린 게, 이게 나이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었다.

2022년에 나온 Paluch 메타분석은 15개 코호트, 성인 4만 7천여 명을 묶어서 봤다. 여기서 사망 위험이 더 이상 안 내려가고 평평해지는 지점이 나이대별로 갈렸다. 60세 미만은 대략 8,000~10,000보, 60세 이상은 6,000~8,000보에서 정체됐다.

40대인 나는 아직 8,000~10,000보 쪽이라, 솔직히 만보가 아주 무의미한 나이는 아니다. 근데 부모님 세대를 생각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엄마한테 만보 채우라고 했던 게 좀 미안해졌다. 예순 넘으면 6,000~8,000보로도 몸이 챙길 건 다 챙긴다는 건데, 무릎 아파하는 사람한테 만보를 들이밀 이유가 없었던 거다.

나이가 들수록 목표 숫자를 낮춰도 된다는 것. 이건 포기가 아니라 그냥 몸에 맞추는 거였다.

0에서 조금만 늘려도 남는 장사

만보 얘기에 눌려서 놓치기 쉬운 게 있다. 아주 조금 걷는 것도 안 걷는 것보다 확실히 낫다는 거.

2023년 유럽 예방심장학회지에 실린 메타분석은 22만 명 넘는 데이터를 봤는데, 하루 1,000보씩 늘릴 때마다 전체 사망 위험이 15%씩 낮아졌다. 4,000보 정도부터 이 효과가 유의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더라. 만보까지 안 가도, 소파에서 4,000보로 옮겨가는 그 구간이 사실 제일 남는 장사라는 뜻이다.

나처럼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하는 사람한테 이게 위안이 됐다. 오래 앉아 있어도 걸음 수를 어느 정도 채우면 그 손해를 상쇄한다는 정리도 있었고. 그래서 요즘은 점심 먹고 회사 건물 한 바퀴를 돈다. 3,000보 안팎인데, 안 하던 걸 하니 저녁에 폰 숫자가 확 달라지더라.

숫자보다 어떻게 걷느냐가 남았다

그러다 하나 더 알게 됐는데, 같은 걸음 수라도 걷는 방식이 다르면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거였다.

2025년 Annals of Internal Medicine 연구에 따르면, 하루에 많이 못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걸음을 5분 이하로 잘게 쪼개는 사람보다 한 번에 10~15분 이상 이어서 걷는 사람 쪽이 더 나았다. 물론 흩어진 걸음도 무의미하진 않다는 반대 결과도 같은 해에 나와서, 빨리 걸으면 무조건 더 오래 산다는 식으로 단정할 자료는 아니다. 다만 방향성은 이렇다. 화장실 오가고 탕비실 가는 걸로 만보를 채우는 것보다, 점심 후 15분을 통으로 걷는 산책 한 번이 더 값질 수 있다는 것.

참, 숫자 자체도 좀 걸러 볼 필요가 있다. 스마트폰 걸음 수 앱은 오차가 30% 가까이 난다는 검증 연구가 있다. 손목 워치가 폰보다는 정확한 편이지만 그것도 완벽하진 않고. 주머니에 폰 넣고 다니면서 찍힌 6,412보가 진짜 6,412보인지도 사실 모르는 거였다. 그러니 숫자 하나에 하루 기분을 걸 일은 아니었다.

내일도 아마 만보는 안 채울 거다. 대신 점심 먹고 건물 한 바퀴는 돌 거고. 그거면 오늘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