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근력도 운동을 안 하면 근육처럼 위축된다.”
자료를 넘기다 이 한 줄에서 멈췄다. 사회적 근력이라니. 관계에 근육이라는 말을 붙일 생각을 못 해봤다. 나한테 관계란 그냥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거였지, 운동하듯 관리하는 대상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다 휴대폰을 열어 연락처를 주루루룩 내려봤다. 저장된 번호는 삼백 몇 개인데, 지난달에 내가 먼저 연락한 사람을 세어보니 다섯 손가락도 안 찼다. 가족 빼면 두엇. 나머지는 그냥 번호로만 남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회적 관계가 수명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이 연락처를 보고 나니 그게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혈압도 아니고 콜레스테롤도 아니었다
처음엔 관계가 건강에 좋다는 말이 그냥 좋은 말인 줄 알았다. 마음 편하면 몸도 편하다, 뭐 그런 정도.
근데 하버드에서 1938년부터 사람 수백 명을 십 대부터 노년까지 따라다니며 지켜본 연구가 있다. 88년째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행복·건강 추적 연구다. 이 연구가 내린 가장 일관된 결론이 좀 뜻밖이었다. 오래 살고 행복한 삶을 예측하는 가장 강한 단일 요인이 재산도, 사회적 계급도, IQ도, 유전도 아니었다. 하버드 성인발달연구가 꼽은 건 관계의 질이었다. 따뜻하고 믿을 수 있는 관계가 있느냐.
그러니까 부모가 오래 살면 나도 오래 사는지를 예전에 따로 따져본 적이 있는데, 이 연구는 그 유전보다도 관계의 예측력이 컸다고 말하는 거다.
특히 걸린 대목이 하나 있었다. 50세 때 콜레스테롤 수치가 아니라 관계에 대한 만족도가 80세의 건강을 가장 잘 예측했다는 것. 50세에 관계에 가장 만족했던 사람들이 80세에 가장 건강했다더라. 나 지금 40대니까 딱 그 예측이 시작되기 직전 어디쯤이라는 소리다. 콜레스테롤은 그렇게 챙기면서 관계 만족도는 재본 적도 없었다.
이게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숫자로도 나온다. 미국심장협회는 2022년 공식 성명에서 사회적 고립·외로움이 심장병 사망 위험을 약 29%, 뇌졸중 위험을 약 32% 높이는 것과 연관된다고 정리했다. 심장에 실제로 흔적이 남는다는 얘기다. 관계가 마음의 문제인 줄만 알았는데, 몸에 남는 문제였던 거다.

오래 사는 동네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진 것
여기서 블루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세계에서 유난히 오래·건강하게 사는 지역들이 있고, 그 사람들의 장수 습관을 아홉 가지로 정리한 게 있는데, 놀랍게도 그중 세 개가 사람 관계였다. 가족을 우선하기, 좋은 무리 안에 있기, 어딘가에 소속되기. 채식이나 적당한 운동 같은 걸 상상했지 관계가 이렇게 큰 자리를 차지할 줄은 몰랐다.
블루존이 정리한 장수 습관 중에서도 오키나와의 ‘모아이’라는 게 기억에 남는다. 다섯 명 정도가 평생 서로를 돌보기로 약속하고 사는 소모임이란다. 돈이든 마음이든 힘든 일이 생기면 서로 채워주는, 평생 가는 관계. 나한테 그런 다섯 명이 있나 세어보다가 좀 머쓱해졌다.

그래서 친구를 많이 만들어야 하나 싶었는데, 여기서 생각이 한 번 접혔다. 블루존이든 하버드든 공통으로 말하는 건 관계의 개수가 아니라 질이었다. 인맥을 넓히라는 게 아니라, 진짜 기댈 수 있는 몇 명이면 된다는 거다. 다행이다 싶었다. 이 나이에 새로 친구를 사귀라고 했으면 시작도 전에 포기했을 텐데, 이미 있는 두세 명을 잘 챙기는 거라면 해볼 만하니까.
관리 안 하면 준다는 그 말이 무서웠다
다시 처음의 그 문장으로 돌아왔다. 사회적 근력도 안 쓰면 위축된다는 말. 이 연구를 이끈 로버트 월딩거가 강조하는 개념인데, 한번 맺은 우정은 알아서 유지되는 줄 알지만 실은 근육처럼 방치하면 쇠퇴한다는 거다.
이 말이 왜 무서웠냐면, 내가 딱 방치하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바쁘니까, 피곤하니까, 다음에 연락하지 하면서 미뤄둔 관계들이 연락처 안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근손실이라는 말은 알았어도 관계에도 근손실이 온다는 건 몰랐다.
그래서 관계도 늘려야겠다, 사람을 더 만나야겠다고 결론 내리려던 참이었다. 아니다. 쓰고 보니 좀 다르다. 월딩거가 말한 건 늘리라는 게 아니라 외롭다고 느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미리, 꾸준히 돌보라는 쪽이었다. 헬스장 가듯 대단한 일이 아니라 먼저 안부를 묻고, 곁에 있어 주고, 멀어진 사람에게 다시 연락하는 작은 행동들. 근육이 하루 운동으로 안 붙듯 관계도 그렇게 조금씩 쌓이는 거였다.
WHO도 2025년 6월에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을 대기오염이나 담배에 맞먹는 공중보건 위험으로 규정하는 보고서를 냈다. WHO 보고서는 겁주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강한 사회적 연결이 염증을 줄이고 조기 사망을 막을 수 있다고도 짚었다. 그러니까 위험을 경고하는 동시에, 관계가 약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거였다. 이건 좀 안심이 됐다. 이미 늦은 게 아니라 지금부터 관리하면 된다는 뜻이니까.
연락처를 다시 열어, 반년 넘게 연락 못 한 친구한테 별거 아닌 안부를 하나 보냈다. 답이 올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저녁을 차려야 하니까. 관계도 근육이라는데, 오늘은 문자 하나로 딱 그만큼만 움직여둔다.